건축인가 이게 * 어떤날

평거동 프로젝트가 골조공사를 무사히 끝내고 마감공정으로 들어서며 마지막 고비를 넘고 있다.
건축주 분이 화장실 사양을 변경하고, 내가 타일에 변덕을 부려 변경하자고 건의하며 관련 도면 일체를 다시 그리는 중이다.
장애인용 손잡이를 법규에 맞게 다시 그리다가 R사 제품의 규격이 법규와 다르다는 걸 발견, 크로스체크를 하다가 보니 시간은 22시, 나는 지쳐버림.

오늘 하루 무엇을 했던가.
기세좋게 마감관련 도면을 오늘 다 끝내버리자고 시작했는데...
수전이 우선 탑볼형이 벽부형으로 바뀌고
반매립형 세면대가 탑볼형으로 바뀌고...그에 따라 세면대 카운터 높이가 바뀌고
벽부형 소변기 배관위치를 지정해줘야 해서 설치도면을 찾고
내친김에 모든 도기 및 수전의 설치도면을 다 찾고, 찾고나니 그걸 다 도면에 정확히 반영하고 싶어
편집하고 블록을 만들고...만들다 보니, 적혀있는 치수값과 실제 찍어본 도면의 치수값이 달라서 오전에 한차례 멘붕.
R사에서 견적서 보내와서 수량 다시 검토하고 (앞으로는 선정만 하고 견적서는 다시는 받지 않으리라!)
다시 도면을 그리다보니 건축주가 선택한 복도에 설치하는 탑볼과 수전이 규격이 애매하다는 걸 뒤늦게 발견,
임의로 우선 다른 제품으로 바꾸고...그러느라 또 한두시간 훌쩍.
다른 프로젝트에서 연락오고, 또 전화 전화 전화...
규모검토를 해줬던 아직 계약전인 프로젝트에서 어이 없는 실수를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2차 멘붕. 왜그랬을까 왜그랬을까.
그 어이 없는 실수로 신뢰에 금이 쩍쩍 프로젝트가 날아가도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으리. 애써 태연한 척 다시 도면으로 돌아와 그 장애인용 손잡이에서 3차 멘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은, 해야할 일들(평거동에서만)
바닥 돌나누기 (외부, 내부), 화장실 전개도 및 타일나누기, 남자화장실 도어 상세 현장과 협의하여 결정하기, 실외기발코니 펀칭메탈과 익스펜디드 메탈 중 결정, 옥상정원 변경에 따른 도면정리, 모티스손잡이 확정, 조명....앗, 조명에서 오늘 오지 않았구나. 오전에만해도 확인전화를 할까하다가 부러 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스타일을 보며 그냥 기다려보기로 했다. 헌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전화 없었고 약속은 펑크. 외부 노출마감에 들어가는 조명 디테일 결정. 그리고 무엇보다 소화전 시안....

이것들을 하고 나면, A공장 계획도면 정리, 아니 그전에 H중학교부터 정리.
H사옥은 그렇게 급하다는 허가를 미친듯이 해줬더니 착공도, 결재도 깜깜무소식.
내곡동 통신필증은...내가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파주는...아이씨 파주도...........................................

이게 건축인가. 이게 사는 건가.

나도 그 '물러섬의 미학'...'존재자를 겨냥하는 지각을 넘어서기 위해 겉과 속에서 개별성을 지우고 탈-도구화 혹은 사물화를 도모'하는 걸 하고 싶다. (인용부호 안은 원오원 최욱에 대해 이종건 교수가 쓴 글)

지금 나는 건축의 이 괴리를 간극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는 물러섬의 미학을 추구하고, 건축으로 탈도구화를 하며
나는 장애인용 손잡이의 지름값 32밀리미터를 캐드로 그리고 있다. 장애인노인임산부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별표에서의 설치규정과 보건복지부에서 펴낸 설치메뉴얼의 차이와 실제 내가 현장에 줘야하는 치수 사이에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치수의 범위를 보고 있다.

이걸 뭘로 비유해야 할까.

단순히 매크로와 마이크로 문제가 아니라....

이제 나는 방수를 논하면 방수를 모르겠고
재료를 스터디 하면 재료도 모르겠고
법규만해도 오늘 어이없는 실수를 했고 (법규는 자고 나면 바뀌고)
에너지는 아직도 창호를 어떤 걸 선택해야 할지...모르겠고
근사한 언어로 건축의 미학을 논하는 평론의 분야에는 여전히 열등감만 있고
회사를 운영하며 세금관련 문제는 아마 영원히 머릿속에 들어올 것 같지 않고

건축이 프로그램인지 미학인지 침묵인지 내구성인지 임대의 극대화인지 스펙타클인지 한장의 쨍하는 사진인지 오늘밤은 도저히 모르겠다. 이렇게 또 바닥을 치는 하루가, 주말이, 2017년 봄날이 간다.

다시 * 어떤날

잊고 지냈던 블로그에 들어와 한참을 기웃거렸다. 내 블로그가 아닌 것처럼. 
건축으로 먹고 산 지 십이년째인데 그보다 오래된 블로그를 보니 서먹하고, 
서운해진다.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지내온 시간 안에서는
글을 써야할 아니 뭔가 끄적이고 싶다는 동기나 욕구가 없었다.
이 블로그는 나의 욕구불만이라는 동기로 지어진 혼자놀기의 터였으니.
그래도 십사오년 전의 싸리라는 청년이 밉지는 않은데,
뭘 모르기는 그때의 그나 지금의 나나 매한가지이나
그때의 그는 좀더 파닥파닥거리고 나름 진지하기도 하고 절실함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 요만큼이라도 한 때의 기억들을 남겨줘 고맙기도 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인지는 잘 몰라도
어떤 정서에 기반한 사람인지는 대충 알 것 같다.

다시 블로그를 해볼까?
사소한 단편들이 쌓이고 나면 다시 십년 뒤 나에게 어떤 말을 할 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피에르 클라스트르 저, 홍성흡 역 * 어딘가

부족에 따라, 지역에 따라 이러한 잔인함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기법과 수단, 목적은 다르지만, 최종 목적은 항상 동일하다. 즉 고통을 겪게 한다는 것이다. 나도 다른 저작에서 등 전체에 상처를 내는 구아야키족 젊은이들의 입문 의례를 기술했다. 고통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서 끝이 나고, 고통을 당한 자는 침묵한 채 결국 실신한다.(중략) 그들은 날카로운 재규어의 뼈로 성기와 다른 신체 부위를 뚫었다. 여기에서도 고통의 대가는 침묵이었다. 사례를 수없이 들 수 있지만 그 예 모두는 단지 한 가지, 즉 원시사회의 입문 의례의 본질은 고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체에 가해지는 이러한 잔인함은 오로지 젊은이들의 육체적 인내력을 측정하고 사회가 그 구성원의 자격을 보증하기 위한 것일까? (중략)

그러나 입문 의례가 끝난 후 이미 모든 고통이 잊혀졌을 때에도 되돌릴 수 없는 나머지로서, 칼이나 돌로 몸에 새겨진 흔적들, 그리고 상처 자국들이 남는다. 입문 의례를 받은 자는 자국이 남아 있는 자이다. 고문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의례가 노리는 것은 신체에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입문 의례를 통해 사회는 젊은이들의 신체에 사회의 각인을 새겨 넣는다. (중략) 신체가 기억이 된다.(중략)입문 의례 속에서 집단이 젊은이들에게 보여주는 비밀이란 바로 이것이다. 즉 "너의들은 우리와 같은 무리에 속한다.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와 같고 너희들은 서로같다. 너희들은 똑같은 이름을 지니고 그 이름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 각각이 우리들 사이에서 똑같은 공간과 장소를 차지한다. 너희들은 그것을 지킬 것이다. 너희들 중 그 누구도 우리보다 못하지 않고 낫지도 않다..."(중략)

고대적 사회, 각인의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모든 신체에 똑같이 새겨진 각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너희들은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족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 분리되지 않은 법은 분리되지 않은 공간, 즉 신체 그 자체 이외의 곳에 새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끔찍한 참혹함을 대가로 그보다 더 끔찍한 참혹함이 출현하는 것을 막고자 한 야만인들의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심호함, 그것은 바로 신체에 새겨진 법은 망각할 수 없는 기억이라는 것이다. (제10장 원시사회에서의 고문 중)

무더운 휴가기간 동안 완독한 처음의 책. 마흔 셋의 짧은 생을 살았고, 지금 내 나이 즈음에 이 책을 쓰다. 전체 11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호흡에서 9장과 10장은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11장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전체를 정리하며, '오래된 미래'를 힐끗 엿보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사실 8장까지는 약간 지루했다.)
국가(계급 또는 권력)라는 폭력(또는 억압)이 없이도 사회가 유지되어 왔다는 실증적인 논고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추장의 말과 권위에서 원시사회가 어떻게 사익을 위한 권력을 가질 수 없도록 했는지 그 사회속으로 들어가 구체적인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그 일상적인 활동 이면의 의미를 해독해낸다. 인류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비록 역사 기술에 등재되지 못했을 뿐 이미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온 사회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반전, 뜨거운 위로, 그리고 앞으로의 고민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다만, 클라스트르는 우리에게 그런 사회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잠깐의 시간여행으로 국가라는 폭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권력이 잉태되지 않도록 합의된 공동의 선의(라고 나는 말하겠다)가 있었다는 걸 '보게된다'. 클라스트르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여기 이런 사회가 있었음을, 국가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하나의 권력이 없이도 각자가 모두 동등하고 아무도 아무에게 복종하지 않는 (작은) 사회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클라스트르는 고민의 시작이다. 우선은 원시사회에서의 전쟁이 물론 지금의 전쟁과 그 의미와 작동방식이 다르겠지만, 그 때에도 상시적인 전쟁이 있었다는 점, 매우 작은 인구집단에서 가능했던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가 그와 유사한 다른 공동체와 전쟁의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일시적인 동맹과, 간헐적인 평화도 있었겠지만) 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지든지 간에 작은 공동체와 작은 공동체 간의 대립적 관계를 풀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휴가 * 어떤날

우여곡절 끝에 얻은 두 달 간의 휴가.
세상일이 내 욕심대로 술술 풀린다면야 딱 1년을 쉬고 싶었지만, 나는 매우 감복하며 두 달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기나긴? 휴가에 들어가는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그들을 포함한 이땅의 모든 노동하는 인류에 연민과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 '얕은 연구소(함께 일하는 직원 셋이 설립한 연구소이다. 연구활동은 주로 점심을 겸한 12시부터 1시사이, 그리고 때때로 커피와 담배 한개비와 더불어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진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그리고 건축 전반에 대한 심도 얕은 연구와 토론이 이루어지며, 한 주제에 대해 대부분 5분을 넘기지 않으며, 구체적인 자료와 출처에 기대지 않는 자유로운 학술분위기로 인해 때문에 얕은 연구소라 이름 지었다.)' 에 의하면 오늘날 인간은, 아니 한국의 노동자에게는 주5일 근무에 연간 한달(쪼개지 않고)의 휴가가 적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이것은 최소한의 기준이다. 최소한...이란 말인즉슨 염원이 아니라, 당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래, 현실은 너무도 간절한 염원이다. 내 존재론적 고민이 여기에 있다.

꽤 오래전 오마이뉴스에서 그의 강의를 들어본 이후, 요즘 강신주를 찾아 읽고 있다. 주제 넘은 말이긴 하지만, 그는 글보다 말이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에 읽은 지승호와의 대담집은 괜찮았다. 중언부언이 많은 게 흠이긴 하지만, 그게 말의 특성이고, 편집으로 일일이 다듬지 않고 그대로 풀어 쓴 취지가 있을 거라 좋게 생각한다. 앞으로 책보다는 강의를 더 들어보는 게 나을 거 같다. 요즘 딴지 벙커1에서 강의하는 거 같던데, 일단 오마이뉴스 정치철학 강의를 다시 신청해서 처음부터 다시 들어본다. 제1편 국가는 정당한 것인가-홉스와 클라스트르. 클라스트르를 알게 된 것은 큰 수확.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면서 신에 기댔던 권력의 정당성(왕권신수설)을 대신하여 등장한 사회계약론의 전제가 매우 부실하며 동시에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 

언어의 정원...별을 쫓는 아이, 초속 5센티미터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 다른 감상은 제쳐두고, 비오는 신주쿠의 공원에서 신발을 만들어주기 위해 발의 치수를 재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무척이나 애로틱한 장면인데, 빗소리와 아름다운 화면과 발의 치수를 재는 손끝의 촉감까지 정말 공감각적 표현의 극한이다. 영화가 말하는 신발의 의미도 눈물겹지만, 단 한사람을 위해 치수를 재고, 가죽을 고르고, 재단하고, 실패하고, 또 만들어가는 그 수공예의 과정에 나는 마음이 아려온다. 건축일을 하며 내가 잊었던 것. 우리가 요리를 하고, 책을 쓰고, 작곡하고, 영화를 만들고, 설계를 하는 그 모든 창작과 노동의 이유.


부끄럽다 * 어떤날

부끄러웠고
또 다시 부끄럽다
그저...부끄럽다

내가 하고픈 말들과,
당신들의 논평과...

몇몇의 정신승리, 체념, 그리고 빠른 회복들...

모든 말들을 괄호안에 묶고서
일단 나는 부끄럽다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당신들과
부끄러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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